미안하다는 말, 그 오래된 침묵
사실, 나는 아이에게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직접 전하지 못했다.
식탁 위의 밥그릇
몇 년 전, 아이가 사춘기 무렵의 어수선한 행동으로 나의 인내심을 시험했던 어느 저녁이었다.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피곤했고 아이의 시답잖은 변명에 순간적으로 크게 화를 냈다. 내 목소리는 아이의 귀에 거슬릴 정도로 날카로웠고, 아이는 잔뜩 움츠러들며 고개를 숙였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화를 삭였지만,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저 “밥 먹어라”는 짧은 한마디를 내뱉은 채 무표정하게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찬장을 열고 그릇을 정리하는 나의 뒷모습은 아이에게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반찬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그 침묵 속에서 아이는 그 밥을 먹기 시작했다.
늦은 깨달음
시간은 물처럼 흘러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아이가 친구들과 대화하는 모습이나 사회생활을 통해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과거의 내가 얼마나 어설프고 미숙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때는 내가 부모로서 아이를 바르게 가르치고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내 방식이 아이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보니, 나의 서툰 감정 표현과 권위적인 태도가 아이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작은 상처들을 남겼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틀렸던 순간들이 꽤 많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머뭇거리는 입술
나는 가끔 아이와 단둘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거나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평범한 순간들 속에서 그때의 미안함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이의 편안한 미소를 보거나 일상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도중에 문득 묵직한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고 하면, 지난 세월 동안 굳어진 침묵의 장벽이 너무도 단단해서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어색해질까 봐, 혹시라도 아이가 당황할까 봐, 또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굳이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괜찮을까 하는 복잡한 고민들이 내 입술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적절한 타이밍을 찾으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곤 한다.
오래된 상자
어느 늦은 밤, 잠 못 이루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을 때면 오래된 상자를 열어보듯 지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곱씹어 본다. 아이가 어렸을 적의 작은 얼굴과 잔뜩 겁먹었던 표정, 그리고 내가 내뱉었던 날 선 말들이 희미한 잔상처럼 떠오른다. 이제는 그 시절의 모든 상황들을 훨씬 더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의 실수를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내 마음속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처럼 남아 있는 미안함의 감정만을 조용히 마주할 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창밖의 가로등 불빛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 글쓴이: 이승훈 | 수필가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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