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을 건너는 소리
그날 저녁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긴 하루를 마치고 익숙한 소파에 몸을 깊이 기댄 채 눈을 감고 막 지친 숨을 고르려던 찰나, 손안에 쥐여 있던 휴대전화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액정에 익숙한 이름 하나를 조용히 띄웠다. 피곤함에 눈을 뜰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화면 속 아이의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저 평범한 안부 전화가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아이의 첫마디는 예상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온몸의 감각을 한순간에 멈춰 세우는 듯했다. 아이는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아빠, 저 결혼할래요.” 그 말이 귓가에 맴도는 동안, 수십 년의 시간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전화기 너머의 작고 여린 숨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애써 놀라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내어보려 했다. “응, 그래. 잘 됐다.” 간신히 몇 마디를 이어 붙였지만, 내 입술이 움직이는 동안,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그 떨림은 마치 오래 묵은 먼지가 가득한 창문을 흔드는 가느다란 바람처럼 미미했지만, 내 안의 어딘가를 건드리는 분명한 진동이었다. 아이는 내 목소리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나는 그저 건성으로 대답하며 숨을 고를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수많은 생각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잘 됐다’라는,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그 한마디가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전화는 그리 길지 않게 마무리되었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에도 한동안 멍한 상태로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천장의 어느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막연한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아내도 방금 들었다고 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저녁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무심한 척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한테 방금 전화 왔는데, 결혼한다고 하는군.” 나의 말을 들은 아내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내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지막이 답했다. “나한테도 방금 전화 와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던데.” 우리 부부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빛 속에서 같은 순간을 읽어냈다. 그 짧은 침묵 속에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옹알이를 하던 순간부터, 처음으로 한 발짝을 떼어 놓던 순간, 학교에 입학하며 가방을 메던 뒷모습, 그리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던 수많은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 두 사람은 같은 무게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식탁 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따뜻한 밥과 반찬이 놓였지만, 우리는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침묵하며 보냈다.
오래된 앨범을 꺼내 보았다
그날 밤, 아내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거실로 나와 서재 한편에 쌓여 있던 낡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상자 안에는 먼지가 희끗하게 내려앉은 오래된 사진 앨범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가장 위에 있던 앨범을 펼쳤다.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긴 빛바랜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조용히 쓸어보며, 나는 한없이 작고 여렸던 아이의 얼굴부터 서서히 커가는 모습들을 묵묵히 따라갔다. 흑백 사진 속에는 유모차에 누워 까르르 웃는 아기가 있었고, 몇 장을 넘기자 색색의 장난감을 들고 옹알이를 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는 유치원 운동회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달리는 모습,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어색하게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는 모습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키는 눈에 띄게 자라나 있었으며, 표정은 어느새 어른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 순간의 냄새와 소리, 온기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나는 그 밤늦도록,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사진 속 아이의 시간을 따라 조용히 흘러갔다. 거실의 작은 스탠드 불빛만이 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조용히 쌓인 시간
앨범을 넘기며 흘러간 시간들은 한 권의 책처럼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나는 아이의 첫 울음소리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간을 다시 한번 곱씹는 듯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들도 다시 보니 새롭게 떠오르곤 했다. 손안에서 만져지는 사진의 질감은 차가웠지만, 내 안에서는 따뜻하고도 아릿한 감정들이 고요히 번져나갔다. 이 작은 아이가 이제는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새로운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현실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아이는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고, 그 성장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던 작은 아이가 이제는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는 사실은, 방 한구석에 조용히 쌓여 있던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나는 낡은 사진들을 조용히 매만지며 그날 밤을 보냈다.
새벽녘, 아침 햇살이 창틈으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까지 앨범은 펼쳐진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 글쓴이: 박수민 | 감성 칼럼니스트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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