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시간의 지도
손에 들린 낡은 휴대폰이 작게 울렸다. 액정 화면에 부모님의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뜨는 순간, 심장이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한두 번씩 걸려오던, 길을 묻는 전화가 떠올랐지만, 그것은 늘 익숙한 장소 주변에서 잠시 방향을 헷갈리는 정도의 일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통화 버튼을 눌렀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늘 그랬듯 잠시 길을 잘못 드신 거겠거니 생각하며 평소처럼 ‘어디 계세요?’ 하고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그 말이 공기 중에 퍼져 내 귀에 닿는 순간, 손안에서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릿하게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사소한 혼잣말 같은 어조였지만, 그날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막막함과 당혹감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나는 재차 ‘다시 한번 말씀해보세요, 아빠’ 하고 물었지만, 대답은 같았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그저 알 수 없는 곳에 서 있다는 흐릿하고 떨리는 음성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손안의 차가운 진동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의 낯선 혼란은 차가운 금속성 진동처럼 손바닥 전체를 울렸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질문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디에 계신 거지? 얼마나 헤매셨을까?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잠시 멍하니 선 채로,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숨을 고르며 부모님께 주변에 보이는 간판이나 큰 건물 이름을 천천히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얻어낸 편의점 이름 하나가 얇은 실처럼 끊어질 듯 연결된 상황의 단서가 되어주었다. 나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지만,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까지도 손안에서 느껴지는 휴대폰의 진동은 멈추지 않는 경고음처럼 느껴졌다. 차에 시동을 걸고 평소 부모님이 자주 다니시던 동네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리며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익숙한 길이 낯선 위험으로 가득 찬 미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둑한 편의점 불빛 아래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를 뚫고 도착한 곳은 부모님 댁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늘 가시던 슈퍼마켓 옆의 편의점이었다. 밤공기 속에 습기와 미세먼지가 뒤섞여 흐릿한 시야를 만들었고, 편의점의 주황빛 간판 불빛만이 유난히 선명하게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익숙한 옷차림의 부모님이 나란히 서 계셨다.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계셨고, 다른 한 손은 허공에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변의 오가는 사람들이나 자동차 불빛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그저 작은 섬처럼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내 몸을 지탱하던 모든 힘이 갑자기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가슴속에서 먹먹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내려 다가갔다.
‘엄마, 아빠. 괜찮으세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제야 조금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그 눈빛 속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평소 늘 오가시던 길이었는데, 갑자기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더라는 짧고 혼란스러운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차 문을 열어드렸다. 그 순간, 부모님의 옷깃에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낯익은 체취와 함께, 왠지 모를 짠한 기분이 목구멍을 조여왔다. 두 분은 아무 말 없이 뒷좌석에 앉으셨고, 나는 조용히 차 문을 닫았다. 차 안의 공기는 바깥보다 훨씬 더 차갑게 느껴졌다.
뒷좌석에서 전해지는 미미한 온기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부모님 댁으로 향하는 동안, 뒷좌석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백미러로 슬쩍 비춰보니, 부모님은 나란히 앉아 앞만 바라보고 계셨다. 그 모습에서 평소의 활기 넘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작은 아이들처럼 말없이 고요한 그림자 두 개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땀이 배어났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질문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안겨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디오도 켜지 않은 채, 적막감 속에서 오직 엔진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문득, 뒤에서 전해지는 미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아주 오래전, 내가 아이였을 때 부모님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느꼈던 그 따뜻하고 든든한 온기와는 너무도 다른, 어딘가 불안하고 가녀린 온기였다.
집에 도착해 부모님을 현관까지 모셔다드리고, 혹시 불편한 곳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재차 물었다. 부모님은 괜찮다고, 이제는 다 괜찮다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 손에는 힘이 빠져 있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나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빈자리가 휑하게 느껴지는 차 안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부모님 댁을 나서는데,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제 내가 떠나고 나면, 이 밤의 공백을 두 분이 또 어떻게 채우실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 한편을 차지했다.
창밖을 스치는 흐릿한 가로등
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방금 부모님을 모셔다드린 길과 같은 길이었지만, 풍경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앞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하나하나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눈앞의 도로 표지판이나 멀리 보이는 상점 간판들이 제대로 읽히지 않고 뿌옇게 얼룩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실제로 시야가 흐려진 것인지, 아니면 내 마음속의 먹구름이 시야를 가린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팔은 여전히 왠지 모르게 뻣뻣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평범했던 저녁이 끔찍한 악몽처럼 변해버린 것 같았다. 그날 밤의 공기는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갑고 무겁게 느껴졌다.
차가운 밤공기 속을 뚫고 한참을 달려 겨우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자 익숙한 차 안의 공기가 차가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핸들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날의 모든 장면이 스쳐 지나가며, 내가 걸어왔던 시간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시간에 대한 묘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텅 비어 있는 주차장의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날 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 글쓴이: 최윤아 | 에세이 작가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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