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기일, 무심코 발걸음 떼면 놓칠 수 있는 것들: 뜻밖의 위로를 찾은 산책 이야기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날, 혹시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시는지요? 매년 돌아오는 그날이 되면, 마땅히 해야 할 것만 같아 괜스레 마음이 분주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묵직한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계획하지 않았던 작은 발걸음이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위로를 건네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버지 기일에 문득 떠올라 찾아간 어릴 적 동네에서 경험했던 담담한 위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발이 먼저 그곳으로 갔다
어느덧 2026년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그날, 특별히 뭘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잠시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뛰놀던 옛 동네가 떠올랐고, 발이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한 시간쯤 천천히 걸으며, 옛 추억을 되짚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그 장소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걸음마다 어린 시절의 잔상이 스쳤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종종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과거의 장소를 방문합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그곳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평화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는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제가 다시 찾은 어릴 때 동네는 과거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한때 정겹게 오가던 골목길의 풍경은 낯설게 변해 있었습니다. 동네 어귀에 있던 작은 문방구, 늘 북적였던 슈퍼마켓, 단골로 들르던 빵집까지, 아는 가게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익숙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들과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이처럼 변모한 풍경 앞에서 우리는 한 시대의 종말을 목격하는 듯한 아련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마치 네이버 블로그 ‘W 에덴으로 가자.’에서 ‘잠깐 자리 좀 비켜줘.’라는 말과 함께 형이 말없이 문을 열고 나가, 탁탁 하는 구둣발 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멀어져 가는 장면처럼, 익숙했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은 언제나 쓸쓸함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그 쓸쓸함 속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존재들입니다.
골목 모양만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변했을 것만 같았던 그곳에서도, 변치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골목 모양은 그대로였다는 점입니다.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 선 그 길은,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의 윤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익숙한 골목길의 곡선과 경사를 따라 걷다가, 저는 잠시 걸음을 멈췄습니다.
사라진 가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한 그 길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튼튼한 다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도 변치 않는 기억의 공간이 존재합니다. 외부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더라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내면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골목길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데, 아버지께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막상 마음에 담아두었던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텐데, 그 순간에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의 공기, 바람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희미한 발소리를 들을 뿐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침묵 속에 서 있다가 그냥 걷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결코 공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떤 말보다 깊은 교감과 이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때로는 구구절절한 말보다 그저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가장 진실한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할 말 못 찾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의 표출이었던 것입니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홀로 떠난 산책이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 저는 타인의 공감과 연결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제 개인적인 추모의 시간이었으나, 이러한 감정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경험하게 되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이 순례를 마치고도 계속 연락하며 친구로 지내다가, 삼십여 년이 지난 뒤 다시 순례길에서 약속하고 만나 같이 걷는다는 ‘산티아고 순례 II: 포르투갈길’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는 비단 순례길에서뿐만이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걷지만, 때로는 우연히 만나거나, 서로의 존재를 알고 지내며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로가 됩니다. 홀로 걸었던 그 날의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도 작은 위로와 공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냥 걷다가 왔다
아버지의 기일에 떠났던 짧은 산책은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익숙했던 모든 것이 변해버린 곳에서, 변치 않는 길의 모양새를 발견하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위로와 소통을 경험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리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눈물로, 누군가는 추억을 이야기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조용히 기억의 장소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를 얻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만의 진솔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이와 연결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2026년, 당신의 추모의 날은 어떤 모습일지 한번 상상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버지 기일에 혼자 걸었던 그 길은 뜻밖의 위로를 안겨주었습니다.
변해버린 풍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골목길은 추억의 굳건함을 일깨웠습니다.
할 말을 찾지 못했던 침묵의 시간은 가장 깊은 교감의 순간이었습니다.
참고 출처
✍️ 글쓴이: 오민석 | 푸드 칼럼니스트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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